끝과 시작 - 비스와바 쉼보르스카(Wislawa Szymborska) 시선집

1. <거대한 숫자> 중에서 p.221

 ....

시기상조에 불과한 근심 걱정

정녕 내가 온전하게 살아가고 있는지, 그것으로 충분한지

단 한순간도 충분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고, 지금은 더욱 그러한데

뾰족한 수가 없기에 끊임없이 버리면서 선택한다

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버렸으니

그만큼 복잡하고, 그만큼 성가시다

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상실한 대가는

고작 시 한 구절과 한숨뿐


2. <가능성> p.307


영화를 더 좋아한다

고양이를 더 좋아한다

강가에 서있는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

도스토예프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

인류을 좋아하는 나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를 더 좋아한다

비상용으로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고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.

초록색을 더 좋아한다

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

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

약속엔 조금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.

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

가장자리가 예쁜 옛날 삽화들을 더 좋아한다.

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

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

사랑을 할 땐, 명확하지 않는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

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

내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지만 도덕적인 사람을 더 좋아한다.

너무 쉽게 믿는 친절보다 사려 깊은 친절을 더 좋아한다.

문명이 있는 땅을 더 좋아한다.

정복하는 나라보다 정복당한 나라를 더 좋아한다

약간 주저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.

정리된 지옥보다는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

신문의 1면 보다는 그림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

잎이 없는 꽃보다는 꽃이 없는 잎을 더 좋아한다

다듬진 개보다는 길들지 않은 그냥 꼬리의 개를 더 좋아한다.

내 눈이 짙은 색이므로 밝은 색 눈동자을 더 좋아한다

책상 서랍들을 더 좋아한다

여기에 말한 많은 것들보다 여기에 말하지 않은 것들을 더 좋아한다.

다른 숫자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자유로운 0을 더 좋아한다

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

행운을 빌며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.

얼마나 더 남았는지, 언제인지 물어보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

모든 존재가 그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는

가능성을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을 더 좋아한다.


<ABC> p.415


이제 절대로 알 수 없으리라

나에 대해서 A가 어떻게 생각했는지

B는 결국 나를 용서했는지

어찌하여 C는 괜찮은 척, 잘 지내는 척했는지

E의 침묵에 D가 어떤 방식으로 관여했는지

F가 기대했던 건 무엇이었는지(혹시라도 기대를 했었다면)

모든 걸 알면서도 D는 왜 모른 척했는지

H는 무엇을 숨기고 있었는지

I가 덧붙이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는지

내가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

그 어떤 의미라도 남겼는지

J와 K, 그리고 나머지 알파벳에게


덧)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
비스와바 쉼보르스카(Wislawa Szymborska) 시선집
<끝과 시작>에 실린 시 중 세편을 옮겨봅니다.
 
이른 종무식 덕에  나름 긴 연말 휴가를 광주에 내려와 보내고 있습니다. 이번 휴가는 모든 색도, 냄새도, 풍경도 사라지고, 오직 눈만 온 땅과 공기 중에 가득합니다. 
덕분에 밖에 나갈 엄두도 못내고 있습니다.

아파트 14층이라 땅에 쌓인 눈 보다는
강남대로에 꽉 막힌 차들처럼, 미쳐 내리지 못하고 빽빽하게 공기중에 떠다니는 눈으로(정확히는 14층에서 볼수있는 코앞의 공기만으로..) 대설주의보라는 말을 짐작할 뿐입니다.
덕분에 길게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습니다. 

다소 진부하지만 어김없이 2007년의 끝과 2008년의 시작 앞에서 생각이 길어질 수 밖에 없네요. 

조금은 덜 진부한 꿈을 꾸고, 다른 상상력으로 다양한 풍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 2008년이 되길 바래봅니다.  






by michel | 2007/12/31 19:29 | 고이고 흐르는 글 | 트랙백 | 덧글(0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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